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스 출신이며 69번째 올림피아기인 기원전 504-501년에 전성기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 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애에 대해 믿을 만한 자료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인 클레안테스와 스파이로스 등은 주로 그의 이론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주로 기원 후 3세기에 활동했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해준다. 그는 여러 저명 한 인물들에 관해 떠돌던 당시의 자료들을 자유로이 수집해서 본격 적인 전기를 편찬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 는 자료들은 주로 그 인물들에 대한 전설들이나 남아 있는 저작들을 모티브로 삼아 상상력을 가미해서 만들어낸 일화들이므로 신뢰하기가 힘들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것은 그가 남긴 말들, 즉 그의 사상에 국한되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최초의 철학적 평가를 내린 플라톤은 그의 사상을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로 요약했고 우리는 이것을 마미유전설이라 부르고 있다. 플라톤은 있는 것들의 불변성을 강조했던 파르메니데스와 대립적인 위치에 헤라클레이토스를 놓는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대립구도는 플라톤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라는 양극을 설정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들 중에서 만물유전설의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물의 근원질료를 불에서 발견해 낸 인물로 평가하면서 밀레토스 자연학의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했다.
이 두가지 평가는 다소 모순적인 측면을 지니는데, 전자가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만물의 단일한 근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대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특정한 맥락에서 이전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 이론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를 계승한 스토아 학파를 통해서 드러난다. 비록 자신들의 관점에서 라클레이토스를 오해한 측면이 상당 부분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학파는 고대세계에서 그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유일한 적자로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스토아 학파의 저작들도 지금 우리에게는 단편으로만 전해진다.
사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은 상당 부분 후대의 기독교 교부들인 클레멘스, 히폴뤼토스, 오리게네스 등의 저작에서 발췌된 것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적인 사상을 지닌 최초의 이교도의 모습을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발견하고자 했으며, 따라서 로고스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불을 최후의 심판과 연결하고자 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 경향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진면목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왔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해석들 전부를 단지 후대 사상가들의 편의에 따른 취사선택과 단편들의 체계적인 왜곡과정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동안 근대 문헌학 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의 단편들을 인용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
여 그 자체로 복원하고자 하는 활발한 작업들이 큰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올바른 단편해석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 여겨진다. 하지만 원래의 단편의 복원이라는 과제와 그것의 해석이라는 과제는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헌 자체가 인용맥락을 떠나서는 이해되기 힘든 것들이 상당수 있다.
또한 단편의 인용맥락들이 그의 사상을 반드시 왜곡한다는 강력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직접적인 자료를 접할 수 있었던 저자들에 비해 지금의 우리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원래 의도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보증할 수 없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기존의 해석 경향들을 최대한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들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유연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는 남아 있는 100여 개의 단편들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배역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그는 단 한 편의 저작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원래 어떤 형태의 저작이었는지는 논쟁이 분분하다.
우선 그의 단편들은 희랍의 현인들이 남긴 경구를 닮아 있으며, 따라서 그의 원래 저작 역시 단편적인 경구들의 모음집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점은 후대의 해석자들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서 각 단편을 원래의 맥락에 관계없이 손쉽게 인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지지받을 수 있다.
반면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의 저작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전해주는데, 만일 우리가 이를 신뢰할 수 있다면 그 저작은 분명한 저술 의도를 지니고 체계적으로 쓰여진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저작의 서문으로 평가되고 있는 체계적인 이오니아 산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 주고 있으며, 다른 여러 구절도 여러 가지 다양한 산문체의 특성을 보여주므로, 그가 반드시 경구 형식만을 고집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를 고려해 보았을 때, 그의 단편들의 완전히 정확한 배열은 불가능하더라도 일단은 그것들이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서술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편이 전체적인 사상파악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 제시된 단편들의 순서는 단지 내용의 유사성에 따라서 묶여졌으며 원래의 저작형태가 어떠했을지에 대한 특정한 고려 없이 배열되었음을 밝혀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타인들의 무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비판은 반대로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의 사상 이 이해되기 힘들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당시의 사람들뿐 아니라 이 후의 사람들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수수께끼를 내는 자', '어두운자’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이는 그가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앎과 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앎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은 어리 석은 대중들에 대한 한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을 둘러싼 당대의 사고체계와 한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내포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비판이 대중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지자로서 알려진 자들, 즉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와 같이 희랍인들의 정신적인 스승들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의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아르킬로코스, 헤카타이오스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들의 어떠한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가 이들을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던 인물들로서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지혜가 이들이 말하는 박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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