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는 탐구의 정신으로 충만한 이오니아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며, 따라서 그것이 강조하는 자연에 대한 직전적인 탐구를 부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는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감 각에 대한 회의주의와는 달리 감각의 증거를 신뢰한다.
반면에 그는 단순한 경험자료들의 축적이 지혜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혜를 갈구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물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박식은 지혜를 가르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참된 지혜는 실용적인 지식들의 무분별한 집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것을 파악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탐구는 감각에 대한 그릇된 사용, 즉 감각이 전해주는 사물의 모습을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습성을 비판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헤라클레이토스 이전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앎의 모델에 따르면, 앎은 감각(aisthesis)이나 직관(nous)과 같은 인식기관이 그 대상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얻어진다. 다시 말해서 눈과 코, 귀나 입이 사물을 직접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듣거나 맛보는 등의 직접 접촉을 통해서 그 사물은 그 자체로 즉시 그 기관들에 알려지게 된다.
이러한 앎의 모델은 직관을 통한 앎의 획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이 때 직관은 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식기관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앎의 모델에서는 대상과의 접촉이 곧 그것에 대한 앎의 획득을 의미하며, 그 사이에 어떠한 불일치도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이 안다는 것은 직접 경험한 것이건 신의 도움에 의한 것이건 간에, 많은 대상들과 접촉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부터 얇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그가 말하는 참된 앎은 그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우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앎의 대상은 이전과는 달리 인식 기관의 접촉에 의해서 즉시 파악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탐구의 대상은 발 견하기 어려운 성격, 즉 자신을 숨기면서 단지 징표만을 보이는 어떠한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탐구를 필요로 하지만 그러고도 아주 적은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인식대상의 차이는 이에 상응하는 인식기관의 차이를 요구한다. 그가 인식의 기관으로 여겼던 혼(psyche)에게서 강조되는 기능은 개별적인 대상 각각을 파악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것들을 비교하고 공통성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얇은 직관에 의한 보다는 추론에 의한 앎에 더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식의 양적인 증가가 아니라 여러 지식들을 하나의 지혜로 이 끌 수 있는 혼의 능동적인 작용이다. 나아가 여러 단편에서 탐구의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은 그가 이미 성취된 앎의 사용뿐만 아니라, 앞에 이르는 과정 또한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참된 앎을 획득할 수 있는 어떤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는 탐구의 과정에서 겪을 수 이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의 단편들이 탐구의 목적지인 동시에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 숙고하고 사색해아만 하는 어떤 것으로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탐구의 목적지는 만물을 통해서 만물을 조종하는 예지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목적지를 알고 예상하고 있는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들은 본래 이 러한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발견해 낸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만물이 하나의원리에 따라서 생성, 소멸하며 그 원리는 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그 자신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그는 로고스라고 부른다. 이 로고스는 이후의 철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로고스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말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그는 탐구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공동으로 말을 사용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이 공동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호메로스가 이(風)를 죽이고 있는 소년들에게 속았듯이, 말은 사물을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면 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장님이었던 호메로스의 앞 못 보는 상태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비유를 제공한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로고스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단지 일상적 인 말이 아니라 사물의 참된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만물에 공통적인 원리를 로고스라고 부른 까닭도 바로 그 원리가 언어의 올바른 사용과 이해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참된 본성을 가리키는 로고스는 말의 차원을 넘어서 사물의 본성 자체로도 여겨진다. 언명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가 로고스를 자신의 말과 분리해서 사물의 본성 자체로 생각한다는 암시를 받는다. 우리는 또한 로고스를 그의 말과 별도의 어떤 것으로 여길 수 있게끔 하는 언어유희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말하고 있는 로고스는 동시에 언제나 그러한 바로 그 로고스이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라는 의미와 사물의 본성 자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로고스의 성격은 이후에 말과 실재, 나아가 노모스와 퓌시스의 대립이라 불릴 만한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가 이 점을 염두에 두지는 않은 듯하다.
로고스는 말 이외에도 '모음'과 비율' 이라는 두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들은 후대에 이성적 사고나 논리적 추론이라는 의미로 발전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말하는 얇은 각각의 사물들을 비교하고 그것들의 공통성을 한데 모아서 파악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이때 드러나는 사물의 참된 모습은 다름 아닌 대립적인 것들이 한데 묶여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대립적인 것들을 하나의 문장에 묶어서 표현하는 그의 문체가 보여주듯이 로고스는 대립하는 것들 각각이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한데 묶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일견 불화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통일적인 세계를 이루어낸다. 또한 로고스는 사물들의 임의적인 모음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일정한 비율을 표현하고 있는 것들의 모음이다.
만물이 어떤 원리에 따른다는 것은 그것들이 언제나 동일한 비례관계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으며 그 관계를 벗어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가령 활의 비유는 하나의 이미지 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의 비례관계를 표현해 주는 공통의 틀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풍부한 비유적 인 표현들을 단지 하나의 구상적 이미지로만 생각해서는 안되며 실재의 정확한 비율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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