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가 발견해낸 실재의 비율은 대립자들로 표현된다. 대립자들에 대한 생각은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희랍적 사고의 기본적인 전제에 가까우며, 직접적으로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대립자에 대한 생각을 우주론의 핵심에 끌어옴으로써 대립 자체의 의미가 충분한 깊이와 강도를 지니고 사유되기 시작한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공적이다.

     

    희랍에서 대립자들에 대한 사고는 계절이나 기상현상들의 주기적인 변화를 관찰한 것에서 기원했을 것이며, 헤라클레이토스에서도 대립자들의 주기적인 변화는 대립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모델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대립관계는 한 가지의 고정된 모델을 따르지 않는데, 이것은 그의 탐구 방식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그의 단편들을 살펴보면 그가 다양한 자연현상들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을 목격하게 된다. 많은 단편에서 그는 경험적인 사실 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표현들은 특정 이론에 입각하지 않 아도 그 자체로 참된 진술이다. 

     

    이는 밀레토스 자연학의 실증적 경향을 극단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속에 내재한 사변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나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특정한 대립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 같지 않으며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든 대립의 관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더 집중한 것 같다.

     

    그가 제시하는 대립자들의 구상적인 표현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경험이 파악하지 못한 사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보기에 특정한 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동물들의 관점에서는 그와 대립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가령 같은 바닷물도 물고기와 사람에게 각각 삶과 죽음을 가져다준다. 또한 진흙탕이나 볏짚, 또는 살갈퀴는 인간들에게 불필요하거나 심지어는 해로운 것이지만 돼지나 당나귀 또는 황소들에게는 맑은 물이나 금, 좋은 음식보다도 더 소중하다.

     

    나아가 아름다움도 원숭이와 사람에게 다른 기준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므로, 결국 가장 아름다운 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쓰레기 더미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가치의 상대성은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들은 서로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고 따라서 대립적인 성격을 지닌다. 질병과 굶주림, 피로를 모르고 지낸다면 자신의 건강과 포만, 휴식도 달콤하고 좋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행위나 상황이 없다면 사람들은 결코 정의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신만이 모든 것을 정의 롭다고 여길 것이다. 인간이 사물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대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가치의 대립적인 성격은 비단 인간의 습관이나 관습, 또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물이 대립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사물 자체가 대립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을 곧게 만들기 위해서는 축융기가 그 실을 둥글게 감아야만 한다. 축융기는 실을 곧게 만드는 동시에 구부린다.

     

    원 위의 점은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더 잘 보여준다. 원을 그릴 때는 어떠한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점으로 되돌아와야만 원이 그려질 수 있으며, 출발점과 끝나는 점이 다른 것은 이미 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또한 위로 향해 있는 길은 아래로도 향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위로도 향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임의로 부여된 대립적인 성격이 아니며 대립자 중 한쪽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쪽이 있어야만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전체 우주에 대한 설명 을 제시한다. 그의 우주론에서는 밀레토스 자연학이 제시하려고 했던 천체들이나 기상현상들에 대한 자연학적 설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자연현상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태양에 관한 것에 한정되어 있는데, 그나마도 태양에 대한 자연학적 설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은 극히 예외적이다.

     

    전해지는 몇몇 간접 전승들에 따르면, 천체들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즉 천체들은 사발 모양으로 생겼으며, 그 사발들은 불을 담고 있는데, 그 불들은 바다에서 만들어지는 증발기(蒸發氣)에 의해서 보충된다. 또한 이 사발 모양의 천체들이 회전하면서 식(蝕)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주론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관심사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운행원리이다.

     

    그의 우주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불인데, 이 세계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며 그것은 적절히 타고 적절히 꺼진다. 또한 불은 동일한 비율에 의해 바다와 땅, 그리고 뇌우로 변화한다.

     

    그가 불을 만물의 근원 질료로서 생각하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가 불을 아낙시만드로스의 공기와 유사하게 어떤 질료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는 점을 뒷받침해 줄 근거는 많지 않으며,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질료로서의 의미는 그리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가 불을 선택한 까닭은 그것이 변화하는 만물의 원동력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 어떤 원동력이 필요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헤라클레이토스는 또한 전쟁으로 표현한다. 비록 불과의 관련성을 직접 지시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러한 단편들은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동력을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히폴뤼토스가 언급하고 있는 한 단편은 불이 세 계의 생성과 소멸에 관련된 것으로 묘사한다. 불에 대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그것이 만물의 변화를 규제하고 조종한다는 점이다. 불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에서 만물을 조종하는 번개는 우주의 불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세계 운행의 이성적인 원리를 상징한다.

     

    그 인용 맥락이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 역시 불을 부정의의 심판자로서 그리고 있다. 또한 불은 만물을 교환시키면서 그 가치들을 평가하는 역할을 맡는다. 우주적 불의 상징인 태양이 등장하는 단편들도 적도와 정의(diké, 正義) 개념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밀레토스 자연학이 우주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비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있다.

     

    그는 우주론과 인간의 삶을 분리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의 우주론에는 윤리적인 당위의 어조가 강하고 그의 인간에 대한 언명들은 만물의 공통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우주와 인간의 삶을 함께 사유하고자 하는 후대의 어떠한 사상가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듯이 그의 우주론을 인간에 관한 단편들과 완전히 결합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의 나머지 단편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그의 단편 전체의 핵심에는 언제나 앎이 자리 잡고 있다. 다음으로 그에게서 삶과 죽음은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사유의 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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