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경에 태어나 490년경에 죽었다. 그의 생애 및 사상과 관련해 가장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그런 만큼 가 장 영향력 있었던 것은 기원후 3세기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200~250년) 및 신플라톤주의자들인 포르퓌리오스(234-305년)의 이암블리코스(245-325년)가 쓴 피타고라스 전기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기원전 1세기경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존속되었던 신피타고라스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의 저술들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그런데 신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피타고라스를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는가 하면, 그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희랍(헬라스) 주요 사상들의 원천으로 부각시키는 등,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과장하여 소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경향을 신플라톤주의자들인 포르퓌리오스와 이암브리코스는 그대로 이어받았다. 따라서 신피타고라스 주의자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술들은 역사적 피타고라스가 실제로 무엇이 생각하고 행했는지를 알아내는 데 혼란을 초래한다.

     

    디오게네스, 에로티오스는 비교적 피타고라스에 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러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가 참고한 자료가 신피타고라스주의자들 이것들이어서 그의 저술도 신뢰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들의 글들 속에는 주요한 초기 자료들을 인용한 것들도 있어서, 적어도 이것들은 역사적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사상을 재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결국 역사적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왜곡 된 후기의 자료들이 나오기 이전의 초기 자료들에 의존할 필요가 있 다. 이들 자료 중 중요한 것들로는 우선 기원전 4세기 무렵의 것들로 서 지금은 소실된 아리스토텔레스(384-322년)의 두 저서의 단편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인 디카이아르코스(360-250년)와 아리스 톡세노스(370-290년)의 단편들, 그리고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역사 가 티마이오스(350-260년)의 단편들이 있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구 전에 기초한 것들이었기에 중요한 문제들과 관련해 불일치를 보이는 한계도 있다. 피타고라스와 관련해 일차적인 주요 자료들은 피타고 라스와 같은 시대 사람들의 증언들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서자들의 증언들이다. 이것들은 아쉽게도 많지 않으며 또한 간략한 언급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신 증언들이 다른 초기 철학자들의 경우보다는 폭넓게 있는 편이다. 이를테면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이온 헤로도토스, 이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의 증언들이 있다. 이렇듯 여러 증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가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신빙성 있는 것은 아주 적다. 비교적 신빙성있는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그는 기원전 570년경에 사모스 섬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면서 이집트를 여행하기도 하지만, 기원전 530년경에 폴뤼크라테스의 폭정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크로톤으로 이주한다. 거기서 많은 사람을 이른바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 으로 인도하여 공동체를 만들고 종교적·도덕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갖는다.

     

    하지만 기원전 510년경 아마도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이 지닌 배타성으로 인해 그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압박이 가해지자, 그는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고 기원전 490년경에 죽음을 맞는다. 

     

    피타고라스 사후에도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나라의 국사를 돌보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기원전 450년경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회의를 하던 밀론의 집을 퀼론의 추종자들이 불살라 상당수의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이 희생된다.

     

    그 후로도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두 명의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나오는데, 그들은 크로톤 사람인 필롤라오스(기원전 470-385년), 와타라스 사람인 아르퀴타스(기원전 428-350년)이다. 일반적으로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며 합리적인 우주론자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를 뒷받침할 만한 초기 자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초기 자료들을 통해 일단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혼의 전이설(metempsychosis)의 전파자이며, 이른바 피타고라스식 방식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합리적인 것과는 상당히 거 리가 멀어보이는 불가사의한 능력의 소유자로도 보인다.

    혼의 전이설과 관련된 주요 자료로는 헤로도토스의 글, 디카이아르코스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포르퓌리오스 의 글, 크세노파네스와 키오스 사람인 이온의 말을 인용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글을 들 수 있다.

     

    이온의 증언을 보면, 그는 피타고라스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고 사후에 혼의 삶이 있다는 견해를 편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사후에 혼의 삶이 있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혼이 불사적이며, 다른 종류의 동물들로 옮겨간다고, 그래서 모든 동물은 동족관계에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피타고라스가 가졌던 생각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혼의 전이는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도 피타고라스의 믿음이었다고 봄직하다. 이렇게 보면 피타고라스의 혼의 전이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흡사해 보인다. 그러면 피타고라스는 언젠가는 이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일까?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살목시스 이야기에 나오듯, 인간이 “영원히 살아남아 온갖 좋은 것을 소유할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언급은 인간이 언젠가는 윤회의 굴 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여지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가 윤회의 주기를 헤로도토스가 말하듯 3000년이라 고 믿었는지, 그리고 헤라클레이데스가 말하듯이 혼이 식물로도 옮 겨간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들에서 피타고라스 자신에 대해서는 단지 한번 언급하는데, 그를 삶의 방식의 창시자로 묘사하고 있다. 플라톤의 증언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사후 100년이 넘은 시점까지도 그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고 평판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은 피타고라스의 공동체에서 은밀하게 공유되었으며, 아무나 그 공동체에 가담할 수는 없었다. 크로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귀족조차 성품이 안 좋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을 정도였다.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타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했으며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다' (koina ta ton philon)이라는 규칙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에 특징적인 것은 종교의식이나 식생활을 비롯한 생활방식과 관련된 금기사항들의 준수이다. 금기사항들은 글이 아니라 구두로 제자들에게 전달되 었던 금언 형태의 가르침(akousmata) 속에 담겨 있었다.

     

    이 가르침 은 피타고라스주의자들(Pythagoreioi)과 보통 사람들을 구분해 주는 징표나 상징이 되는 것으로서 symbola로도 불리었다. 금기사항들의 일부는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피타고라스가 종교의식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이소크라테스의 글을 통해서뿐 아니라,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실된 책에서 인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 즉 “가장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신께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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