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90년경 그리스 시칠리아섬 남서부의 도시 아크라가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4]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의 할아버지는 71번째 올림피아 경기에서 우승했으며 경주용 말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빛나는 가문 출신이었다.
엠페도클레스는 한때 파르메니데스의 학생이었는데, 이후 그를 떠나 아낙사고라스와 피타고라스의 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피타고라스에게서는 삶의 태도와 몸가짐에서의 위엄을 배우려고 애썼고, 아낙사고라스에게서는 자연 연구를 배우려 애썼다. 하지만 엠페도클레스가 발표한 시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교설이 세상에 공표되어 버린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강의에 엠페도클레스를 비롯한 그 어떤 시인도 참석할 수 없다는 규칙을 세웠다고 한다.
언젠가 계절풍이 맹렬하게 불어 곡물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을 때, 그는 당나귀의 가죽을 벗겨서 자루를 만들도록 명령한 다음, 바람을 붙잡기 위해 그 자루들을 언덕 위와 산등성 주위에 늘어놓았고, 이로 인해 바람이 잦아들었기 때문에 '바람을 제지하는 자'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엠페도클레스는 의술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숨을 쉬지도 않고 맥박이 멈춘 상태로 기절한 여인의 몸을 30일간이나 유지했다가 결국 살려냈다고 한다.
시칠리아 남서쪽 해안도시인 셀리누스에서 사는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려 주민들은 목숨을 잃고 여자들은 유산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던 적이 있었다. 인근의 강에서 나오는 고약한 냄새가 원인이라고 파악한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돈을 들여 이웃하는 두 강을 그 강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생각했고 실제로도 강의 흐름을 합류시켜 신선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전염병은 사라지게 되었고, 셀리누스의 시민들은 이를 축하하며 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 이 때 엠페도클레스가 나타나자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엎드려 경배하고, 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에게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그는 자유인다워 어떤 권력도 혐오했으며 민주정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그가 권력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음식 뒤에 포도주가 나오고 나서야 연회의 좌장은 추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회가 진행된 후에도 여전히 포도주가 나오지 않고 주최자가 독단적으로 연회의 좌장을 결정하였으며 연회의 좌장은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든가 아니면 머리에 쏟아붓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참주정의 기미라고 보고, 바로 그 다음날 초대한 주인과 연회의 좌장을 법정으로 끌어내어 그 두 사람의 유죄선고를 받아내서 사형에 처하게 이르렀다고 한다. 또 한번은 의사 아크론이 자신이 의사들 중에서 최고라는 이유로 조상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장소를 민회에 요구했을 때, 엠페도클레스는 연설자로 앞에 나가서 그건 평등하지 않으므로 제지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후에 엠페도클레스는 세워진 지 3년밖에 되지 않는 '천인회의체[5]'를 해산시켜 버렸다.
올림피아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아크라가스에 돌아와 정착하려 했을 때, 그에게 적의를 품었던 자들의 자손들은 그의 귀향을 반대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펠로폰네소스로 물러가 그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정확하지 않고 이보다 더 유명한 얘기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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