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종교에 대한 그의 언급들을 살펴보자. 우리는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관념의 비판을 이미 크세노파네스로부터 들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밀레토스 자연학이 전통적인 신들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이토스도 전통적인 신관념을 직접 비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를 비난하는 까닭이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그들의 관념 때문은 아닌 듯하다. 클레멘스가 인용한 두 단편은 당시의 의인적인 신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주로 종교적인 제의에 관한 것이며, 정화제의에 관한 오래된 관행을 비판하고 있다. 이를 보았을 때 그의 비판은 그 의미를 망각하고 관례적으로 변질된 제의를 들을 생각 없이 답습하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을 겨냥한다고 보인다.

     

    비록 그의 비판이 제의를 향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대중의 관념에 대한 재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올림포스 신들을 직접 언급하는 구절은 제우스에 관한 두 단편과 디오니소스와 하데스의 동일성에 대한 단편이다. 그는 이들 단편에서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화적인 모티브를 환기시키고 그것을 새로운 맥락에서 재해석하면서 신들에 대한 당시의 생각들이 포착하지 못하고 숨어 있는 의미를 끄집어낸다.

     

    다시 말해서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인 제우스는 만물의 운행을 조종하고 그것의 정의를 보증하는 유일하게 현명한 것으로 해석되며, 디오니소스와 하데스는 삶과 죽음의 동시성과 공존을 보여주는 맥락에서 재해석된다. 따라서 그는 올림포스 신들의 체계를 단지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신화들이 지닌 힘과 진실성을 십분 활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그가 당대의 제의들을 비판한 것은, 결국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신적인 것들의 의미를 사람들이 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종교와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인간의 혼과 사후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에는 인간과 관련해서 혼의 적극적 의미가 강조되지 않았다.

     

    호메로스에서의 혼은 살아 있는 인간을 살아 있도록 만드는 숨결에 불과하며 살아 있는 인간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를 떠나는 역할만을 한다. 혼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죽음 이후인데, 이는 비록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혼이 개개인들에게 사후에도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음을 보증해 준다. 그러나 호메로스에서의 혼이 인간을 살아있게 만드는 생기(生氣)의 역할과 사후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추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자아를 위해서 어떠한 적극적인 기능도 하지 못한다. 아낙시메네스가 혼을 공기와 유비적으로 표현하면서 인간의 삶을 유지해 주는 적극적인 기능을 부여했을 때조차, 이것은 생기로 서의 혼의 역할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혼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인간의 혼에 앎의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이후에 독자적으로 자라

    나게 될 정신의 영역을 새로이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혼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앎에서 로고스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이것은 혼이 앎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혼에 앞의 기능을 부여하면서 그의 탐구는 인간의 자아로 향하

    게 된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탐구는 곧 혼에 대한 내적인 체험으로 연결된다. 이에 대한 중요한 두 단편은 혼에 대한 내적 체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가 ‘깊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혼이 어떤 외연, 특히 깊이를 지닌 것으로 경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07에서 혼이 지닌 그 외연은 확장될 수 있는 성질을 갖는 것으로 언급된다. 

     

    혼이 갖는 이러한 외연이 어떤 경험을 표현한 것인지, 다시 말해 그것이 심리적인 외연인지 물리적인 외연인지를 확정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은 심리적으로 체험되는 동시에 물리적으로 표상된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혼에 인식의 능력을 부여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심리적인 어떤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이 때문에 인식의 상이한 단계에 따라서 규정된 혼의 여러 가지 상태는 물리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혼이 건조한 상태가 되면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상태가 된다. 반면에 그것이 젖게 되면 즐거움을 얻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목적지를 상실하게 되며, 결국 심한 경우에 죽음에 이르러 물로 변화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혼의 삶과 죽음은 앎의 상이한 단계와 관련되며 또한 다른 물리적인 원소들과 관련을 맺는다. 죽음과 인간의 운명에 관련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지를 해석하기는 매우 까다롭다. 

     

    분명 그는 당시에 성행하던 시신에 대한 공경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믿어졌던 사후 세계와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수용되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하데스에 대한 믿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 믿음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이후에 지하의 하데스로 가서 기력 없고 앞못보는 상태로 살아간다. 

     

    지금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희랍인들 또한 죽음 이후에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여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비록 그것이 하데스에서의 비참한 삶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사후의 생존을보장받기를 바랐다. 이러한 하데스에 대한 믿음 이외에도 당시에 급속히 번져가던 윤회에 대한 믿음도 죽음에 대한 인간들의 두려움을 달래주는 믿음 체계로서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이 죽음에 대해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받아들 여지던 믿음 체계들을 얼마나 수용했는지는 남아 있는 단편들을 통해 결정하기 힘들다. 어떤 단편들은 하데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들을 담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을 암시하는 전통적인 모티브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이것을 자신의 사상에 어떤 식으로 수용하고 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또한 그가 비록 만물의 순환을 말하고 있다 할지라도 오르페우스나 피타고라스의 윤회사상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에게서 윤회사상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윤회는 불멸하는 영혼이 계속해서 새로운 육신을 바꾸어 갈아입는 방식이 아니라 영혼 자체가 소멸하고 새로운 것으로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사물의 생성과 소멸에 다름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실세계와 다른 어떤 내세를 상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들의 혼은 죽음과 동시에 다른 원소, 가령 물로 변화되며, 또한 후손을 통해서 자신의 몫을 이어가고자 한다. 반면에 가장 현명하고 뛰어난 자에게는 데 큰 몫이 부여되며 신들과 인간들의 존경을 받고 가사자들로부터의 영속하는 영예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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